Birmingham 2002.05.24

버밍엄

다음날 그는 업무에 복귀해야 했고, 나는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고 한적한 영국 서부의 교외를 가로질러 버밍엄으로 갔다. 버밍엄이 가까운 대도시여서 가보기로 정했을뿐 별다른 사전 지식은 없었다. 그맘때 좋아했던 건축가 그룹 Future Systems의 작품이 있었기 때문에 방문 동기로는 충분했지만, 막상 현지에서 만난 더 인상적인 건물들은 Birmingham Museum & Art Gallery와, 당시 새 건물로 옮긴지 오래되지 않았던 Ikon Gallery였다.

화려한 빅토리아 시대 건축물 BM&AG에 들어서자마자 카메라를 꺼내고 싶었다. 먼저 리셉션에서 사진을 찍기 위한 신청서를 써내고 내 가슴에 카메라 그림 스티커를 붙인 뒤에 사진을 찍을수 있었다.

또다른 빅토리아 시대 건물인 Ikon Gallery에서는 Graham Gussin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외관을 유지하면서 현대적으로 리모델링 된 이 건물이 마음에 들었던 나는 리셉션에 물어 건축가 이름을 알아냈는데, Levitt Bernstein이었다.

나는 철골구조의 고향인 영국에서 처음으로 멋진 철골 건물들을 많이 만날수 있었는데, 20년뒤 독일에서 일할때 영국에서 넘어온 철골구조 레퍼런스 디자인을 엄격한 방화규정에 맞춰 독일식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건물로 바꿔 지어야 했다.

하루 종일 걸어서 도시를 디코딩하듯 탐험하던 중 저녁무렵 누군가가 길에서 나를 불렀다. 당시 나는 지글지글한 코일펌 헤어를 하고 검은 카고 바지를 입고 다녔는데, 그는 아마도 내가 처음 만나본 외국인 게이였고 내 머리가 마음에 든다며 같이 어딘가로 가자고 했다. 따라가지 않았어서 더이상의 이야기는 없다.

버밍엄에서 나는 어디에 묵었는지, 저녁에는 무엇을 먹었는지 아무 기억도 사진도 남아있지 않다. 아마 전체 여행중 숙소가 기억나지 않는 유일한 하루인 듯 하다. 그날 저녁 난 대체 뭘 했을까. 크게 인상적인 경험은 없었기 때문일테니 아쉬울건 없지만, “남는건 사진밖에 없다”는 흔한 말도 조금은 맞는 말인것 같다.